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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딴엔 재밌는

남자의 눈물

http://blog.softbank.co.kr/247 에서 읽은 글입니다. 느껴지는 바가 커서 거의 전문을 옮겨왔습니다. 파라과이에 살면서 매일 어려운 이들이 가게에 들어와 손을 내미는데 한번이, 여러번 아니 매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다른 어려운 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지난 25일 일본 동경에서는 있었던 소프트뱅크의 주주총회에서 손정의회장은 일반안건 처리와는 별도로 2시간 가량을 할애하여 소프트뱅크의 30년 계획에 대한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 발표의 일본어 원문 링크는 http://webcast.softbank.co.jp/ja/press/ ··· dex.html 이고, 혹시 영어가 편하신 분은 동시통역링크인 http://webcast.softbank.co.jp/en/press/ ··· dex.html 를 보시면 된다. 가급적이면 일본어 원문 사이트를 보시라고 권유를 하고 싶다. 그리고 번역을 해서라도 올려 드리지 못함을 너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2시간가량의 30년 계획 발표의 말미에 손정의회장은 그야말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의 할머니에 대한 회상을 시작하면서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억지로 눈물을 훔치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울먹이면서 발표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뒤에 띄워진 여자아이의 사진을 뒤로 하고서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무대를 떠난다. 아래는 연설 전문 중에서 후반부를 정리해 본 것이다. 연설문이므로 말이 조금 끊어지는 느낌이 있으나 문맥 전체를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진은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할머니이다


저는 무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하고 소중한 분입니다. 14살에 일본에 건너왔고, 14살에 결혼했습니다. 상대는 37살인 저의 할아버지. 그녀는 나의 할머니입니다.(이 때 할머니 사진이 올라 온다)

도중에 전쟁도 체험했습니다. 살아있는 것도 겨우 일 만큼 더러운 물을 마시고, 굶주림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오며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일본에서 한국국적으로, 말도 어눌하고, 아는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이 14살에 건너왔습니다. 14살은 아직 애지요. 중학생입니다. 혼자서 낯선 나라에 왔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중학생 때부터 가족을 경제적으로 책임지며, 열심히 일하신 분입니다.

매우 힘들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소주를 만들었고 돼지를 길렀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왔습니다. 그런 중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1957년에제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조금은 살아갈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함석지붕의 너덜너덜한 부락의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의 호적은 사가현 *** 도로 번지로 쓰여있습니다. 아무리 무번지라도 일부러 무번지라고 쓰지 않으면 좋을텐데불법거주이기 때문에, 자기 땅이 아니라, 국철의 선로겨드랑이의 공터에 함석지붕에 판자를 붙여 살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무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3,4세 무렵 할머니가 저를 매우 귀여워해주었습니다. 매일 산책에도 데리고 가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집에 없었습니다. 나를 돌봐준 것은, 할머니였습니다. 매일 할머니가, ‘마사요시야(한국어로 야) 산보가자’라고 하시면, 나는 기뻐서 할머니를 따라갔습니다

할머니가 산책 갈 때는 리어카를 타고 매달려 갔습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무스름한 리어카가 미끄러집니다. 그 리어카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34개 쌓아두고, 거기에 기르고 있는 돼지의 먹이, 잔반이 같이 올려져 있습니다.
역전근처의 식당에서 잔반을 받아다가, 그것을 모아서 돼지 먹이로 씁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리어카를 타는 것만으로 즐겁게 갈수 있었습니다. 단지 어딘지 모르게 미끌미끌하고, 썩은 냄새 같은 게 나면서, 비 온 뒤에 울퉁불퉁한 길에서 웅덩이에서 미끄러지면 떨어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꽉 붙잡아라라는 말을 들으며 매달려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날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지금 보면, 리어카 같은 것은 타고 싶지 않습니다. 창피합니다. 그렇지만, 그땐 어렸기 때문에, 아이였기 때문에, 별로 부끄럽거나 싫지 않고, 즐거웠습니다. 그 후,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할머니가, 아주 싫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싫었냐면, ‘할머니 = 김치, 김치 = 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데 괴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별로 예를 들고 싶진 않지만….역시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참고로, 그의 전기에 보면  이지메를 수없이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런 괴로운 일들을 피하려면 역시 숨을 죽이고, 숨어있듯이, 일본이름으로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더욱 더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제 아버지가 피를 토해 입원을 했습니다. 가족의 위기였습니다. 1살 연상인 형은 고교를 중퇴하고, 울면서 지내던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의 입원비, 집안 써포트를 하는 어머니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미 주저 앉은 것 같은 가족의 위기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해야 될까…나는 그때, 사업가가 되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일시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가족을 유지시킬 수 있는 사업을 일으키겠다 라고 중학생 때 각오를 다졌습니다.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간은 함께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 ‘료마가 간다를 읽었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주눅들어 우물쭈물하던 제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인종이라든지, 그런 사소한 것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 자체가 내가 작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업가를 목표로, 미국에 가자!, 미국에 건너가자고 결심을 합니다. 일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울었습니다. 친구나, 선생님도, 모두가 말렸습니다. 할머니가 걱정된다며 가지 말라고 울고 울고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울었습니다. “가지 말아라,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무서운 곳에 가지 말아라, 가면 돌아오지 못하게 될꺼다”
하지만 나는 뿌리치고, 미국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보석’을 찾아오겠다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잡고, 일본에 돌아와 사업을 일으키겠다고, 반드시 가족을 지탱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친척아저씨, 아줌마, 사촌들에게도 만류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사요시, 넌 냉정한 녀석이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살지 죽을지 모르는 판에, 아버지를 두고, 혼자서 미국에 가다니, 너 자신만을 위해 가는 것이냐’ 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반박했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가족을 지켜내고 싶기에 가는 것입니다. 하는 김에 한가지 더 얘기한다면, 지금까지 제가 고민해온 국적이라는 것, 인종이라는 것, 똑같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사업가가 되어,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간은 함께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고 마음에 맹세 했습니다.

그 결심을 하고서,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이 때부터 손정의회장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할머니, 미안해요 그렇게 나에게 상냥하게 해준 할머니를 나는 정말로 싫다고 말해 버린 것이 너무 죄송해요. 할머니, 나를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제가 그 동안 애써 피해온 선조의 나라를 보고 싶습니다.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라고.

할머니와 함께 둘이서 2주정도 한국을 돌았습니다. 할머니도 기뻐해주셨습니다. “마사요시, 네가 함께 한국에 가 보자고 해서, 겨우 한국에 가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두 명 이서 한국에 갔습니다.

전기도 아직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비옥하지 않은 토지라 사람도 적고, 양초를 켜고 먹는 식탁. 하지만, 모두들 촛불로 켠 컴컴한 식탁에서 새까만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우리들의 헌 옷등을 일본에서 가져 가셔서, 그 마을의 아이들에게 선물로 건네주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만면의 미소로, ‘고맙습니다. 예쁘네요. 일본 옷은 예쁘네요’라고 하며 받았습니다. 그때의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의 웃음은 바로 다른 사람 덕분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누군가가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람을 원망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덕분이므로. 나는 회사를 시작한지 2년 만에 큰 병을 얻어 입원했습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돈도 아니고, 지위나 명예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해준 것처럼 기뻐해주는, 넝마 같은 것에도 기뻐해주는그런 일에 공헌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입원했을 때에 점점 더욱 절실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어린여자아이 사진이 올라 옵니다.)

만난 적도 없고, 본적도 없고, 이름도 모릅니다. 캄보디아인지 어딘지의 작은 여자아이가 흙 묻은 얼굴로, 사과1개를 받고, ‘고맙습니다’라고 합니다. 무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누구에게 감사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 마음속에서 ‘감사합니다’라고..
그렇게 공헌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저 단 한 명의 아이가 기뻐해주었으면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의 연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말로

그의 울음을 해석하거나 평가하거나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너무 건방진 일인 듯 하여 굳이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일본 최고 부호 중 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기업가 중 한 사람이, 2만 명의 부하직원들과 5백 개가 넘는 관계사의 대주주로 있는 한 사람이 그와 그의 회사의 30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눈물로 발표를 마무리 한 것은 그가 발표한 계획이 정말로 진솔하고 결의에 찬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는 사실만은 꼭 얘기하고 싶다. 그가 왜 트위터로 소통을 하는 것에 몰두하는지, 왜 회사 30년 계획을 전세계에 유스트림으로 생중계를 했는지, 그리고 왜 그는 울었는지는 2시간의 연설을 다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그의 발표에 대해 어떤 일본 사람이 트위터에 올린 글인데 정말로 딱 적합한 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옮겨 본다.


「신30년 비전」을 보았다. 소프트뱅크주주도 아니고, docomo 유저이고, Hawks 팬도 아니고, 검색은 Google파이지만, 솔직하게 감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