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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uay 이민생활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오늘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파라과이의 장례식장은 고인의 얼굴을 화장(단장)을 해서 관에 넣고는 관 뚜껑을 개봉해 놓고선 조문객들이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해 놓는다. 그리고 더운 나라인지라 다음 날 아침이면 화장을 하거나 매장을 한다.(교민 대부분의 경우, 까삐아따에 있는 한인묘지나 각 교회 묘지에 화장보다는 매장을 한다.) 그리고 한국과 또 다른 점은 병원과 장례식장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 한국은 병원 내에나 바로 옆에 영안실과 장례식장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파라과이는 따로 따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교민들은 사시장 근처의 오늘 갔던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경우가 잦다.

혹시 사람이 적을까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기우였을 만큼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낮에는 조문객이 없었다고 한다. 정말 가까운 사이라면 낮에 가서 같이 있어주는 것이 좋을 듯. 내 할 일 다하고 챙기는 위로보다는 남들보다 앞서고 내 희생 따르는 조문이 값어치 있겠다.) 거의 세 블록에 한국 교민들의 차가 들어차서 주차를 위해 멀리까지 가야 할 지경.
장례식장에 대사관의 화환이 있는 것은 보기 좋았다. 모든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인지. 몇몇 분들을 위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스무살까지 거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많은 친척들과 지인들이 있었지만 장례식이라는 것에 참여해 본 것은 17살이던가? 같은 반 친구가 부친 상을 당했을 때였다.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열어 논 관 너머로 생전 처음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친구가 느낄 슬픔에 마음도 아팠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 장례식장 밖의 화단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는 사이. 내가 아끼는 사람은 안에서 울고 있는데 하늘은 왜 그리 파랗고,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무심하던지. 참 마음이 아팠고, 세상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슬픔이나 분노도 잠시, 나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 내 가족이나 친지(상당히 많은 편임에도) 중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음을 당연시 여기고 때론 운이 좋다는 생각까지 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이십대 초반 나는 두번 상주가 됐어야 했다. 한번은 당연히 내가 상주였고, 또 한번은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렇게 두번 영정 사진을 들고 장례 행렬을 앞장 서면서 나는 정말 못해 먹을 짓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 혈육이, 절대 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할 가족의 상을 치루고 나는 참 많이 힘들어 했었다. 내 책임 같기도 하고, 잘해주지 못했던 날들 때문에. 사람 목숨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장례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은 나는 내 혈육의 죽음에, 내가 기대고 있는 바로 벽 너머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혈육 때문에 아파하는 사이, 장례식장에 온 조문객들의 많은 수는 화투를 치며 웃고 있었다. 정말 화투장을 들어서 엎고 다 내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일로 나중에 어른들과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장례식장은 사람들이 없이 적막한 것 보다는 그렇게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웃음소리도 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라과이 교민들의 장례식장 모습은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식 또는 파라과이식이다. 집에서 장례를 치루거나 장례식장에서 치루는 경우. 어떤 경우는 한국처럼 음식을 잔뜩 장만해 조문객들에게 대접하며 한쪽 구석에서는 화투나 포커를 치면서 떠들썩 하기도 하고 또는 오늘처럼 음식대신 간단한 다과와 음료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미사나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부친 상을 당한 L씨. 장례식장에서는 안됐다는 말 밖에는 못하고 왔지만, '힘 내세요'란 말 해 드리고 싶네요.